538새벽 | 눅5.12-26
믿음이 답이다.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2-16)
한 중풍병자(17-26)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12)이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의 은혜를 받았다면, 한 중풍병자(18)는 자신을 침상에 메고 온 친구들의 ‘믿음’(20)에 의해 죄 사함과 치유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
[예수님의 선언]
온 몸에 나병들린 사람(13): “내가 원하노니”
사람들(18,20a): (한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한 중풍병자(20b):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17):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21)
두 기적 사건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다(14,17). 제사장(14)은 예수님이 치유한 사실을 공적으로 인증(sign)하는 역할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리고 한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17)은 이 기적을 목도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로 그때 저들은 또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결국 핵심은 이들에게는 ‘믿음’이 없다. 이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이 일이 믿음으로 이루어고 있다고 선언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 즉 정통 유대주의자들은 기적과 믿음을 알고, 보는 일에 실패한다. 그래서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있었다고 해서 그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나병이 들려 있어도, 중풍병으로 움직일 수 없어도 상관없다. 나의 믿음이, 너의 믿음이 이들을 구원한다. 핵심은 믿음이다.
한 가지 생각해 보자.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동일한 찬송과 기도를, 동일한 설교자를 통해 말씀을 듣고,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런데 결과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왜 그럴까? 오늘 본문을 봐도, 이를 예배의 시각에 넣어 봐도 그렇다. 다 있다. 예수님 앞에 모두가 다 앉아 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12,18), 수많은 무리들(15),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17,21), 무리들(19), 모든 사람(26)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오직 유대종교 지도자들만이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다 변화되었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던 무리들(19)마저도 이 기적의 은혜와 역사하심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6) 반응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나는 누구인가? 내 배우자는, 내 자녀들은, 우리 목장의 식구들은, 시댁과 친정의 가족들은, 이 시대 사람들은 지금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가? 나를 지금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통로이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있는가? 주께서 오늘 이루신 일을 보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로 서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오늘 본문에서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