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새벽 | 눅7.18-35
메시야 스펙트럼
요한의 눈높이(18-21): 메시야인가?
처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자 둘을 통해 보낸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20b)
예수님의 대답1(22-28): 메시야다!
그렇다면 실족하지 않으려면, 즉 메시야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무엇보다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가 지금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지금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메시야 언약(예언)의 성취라 말씀한다. 이를 한 마디로 하면 이렇다: “나는 메시야다!”
하지만 예수님은 비록 요한이 흔들리고는 있으나 그는 선지자이자 동시에 선지지보다도 훌륭한 자라고(26), 여자가 낳은 자 중애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신다(28). 그러나 요한이 비록 흔들리는 듯하지만 그는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이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을 구약 말씀의 예언과 성취라는 그림에서 밝히신다(27).
예수님의 대답2(29-35)
예수님께서 요한을 샘플 삼으사 메시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스스로 저버린다(30). 그러자 예수님은 한 다른 비유를 통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신다(31-35). 언뜻 보면 피차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메시야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전혀 다른 언행이라는 점에서 무지한 자와 메시야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메시야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라는 그림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백성들과 세리들은 …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29-30)
이번에도 여지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앞에 두 길이 난다. 듣고 행하는 자(가난한 자들, 22-23,29a)는 ‘하나님을 의롭다’ 고백한다. 하지만 듣고 예수님 쪽으로 언행하지 않는 자들(바리새인과 율밥교사들, 29b)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어긋난 길을 자처함으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고 만다(23).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강렬한 메시지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알려지고 믿어지고 가까이 와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이처럼 흔들릴 때 무엇이 기준이고 안전한 징검다리인가. 바로 구약 언약(예언)의 성취다(22,27).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구약이 나팔을 불고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통해 그에 맞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성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신다.
세상은 여전히 애곡(愛曲)과 애곡(哀曲)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32), 금식과 잔치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33-34). 그러니 그들이 해 내는 언행이 예수께서 선포하시며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복음과 같을 수가 없다. 이렇듯 저들의 수준과 형편과 상태가 고스라니 드러난 셈이다. 영적으로 무지함에도 마치 진리를 말하는 냥 토해내는 것을 보라. 이게 하나님의 나라 밖에 살아가는 자들의 몰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