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새벽 | 사48.12-22
고레스 프로젝트(5)
바벨론의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 은혜를 받을 이스라엘의 실상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둡다(1-5).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14)라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새 일’이다(6-16). 그렇다면 出바벨론 역시 出애굽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다(20-21).
새 일을 행하리라(12-22).
마침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찾아가신다(12). 그리고 저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고레스 프로젝트]를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신다(13-15). 하나님은 이를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영’(성령님, 16, 11.2, 37.7, 42.1, 59.21)을 함께 보내셨음을 기억하게 한다.
고레스를 선택하사 하나님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14)게 하시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에게도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17) 구속자 하나님이시다. 사실 이 모든 게 다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18a)
하나님을 슬프게 밖에 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죄(罪)에 따른 심판을 하나님의 의(義)로 말미암은 사랑으로 역전시키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하였더라면 하나님은 평강과 의로,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수한 자손으로 얼마나 복되었을까(18-19). 이것은 出바벨론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섬세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바벨론의 포로라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기대(18b-19)와 전혀 반대편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出바벨론을 선언하시고, 이 일을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온 열방에 선포하라 하신다(18-19).
하나님은 바로 그 때를, 그러니까 죄 아래 있을 때를, 즉 바벨론이라는 ‘고난의 풀무’(10b)로 달구어 저들을 연단(鍊鍛)할 때를 이렇게 정리하신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22) 그렇다면 하나님께만 평화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정말 아멘이다. 하나님 밖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포로기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 이것을 깨닫게 될 모양이다. 그래서 더 아쉽다.
바벨론이라는 ‘고난의 풀무’(10)에서도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였다(5). 포로가 되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법을 떠남으로써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시키더니 포로기 중에도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상관이 없이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유학을 보낸 이스라엘의 [바벨론학교]는 아무런 소득이 없이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하나님 편에서 수습을 시작하신다. 죄는 내가 지었고, 그 결과 바벨론의 포로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그 풀무 불에서 꺼내신다.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내 행한 것은 죄(罪)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은혜를 다시 또 받게 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래서 이 복(福)은 이스라엘(‘나’)의 노력이나 땀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다는 것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이스라엘(‘나’)을 해방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