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353새벽 | 남자와 여자의 영적인 질서(고전11.2-16)

353새벽 | 고전11.2-16

남자와 여자의 영적인 질서

  

문제는 공예배의 무질서다. 해법은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여자 성도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한 나머지 예배 시 머리의 수건을 벗어버렸다.

이 문제는 당시 헬라(그리스)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여자가 공중 석상에서 벗은 머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여자라는 징표였다. 바울이 이렇게 명하고 있는 배경에는 당시 고린도가 가장 방종한 도시 가운데 하나여서다. 당시 이방 신전의 매춘부들은 머리를 짧게 했으며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채 다녔다. 그래서 머리 스타일(hair style)과 태도는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공표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따라서 당시 신전의 매춘부들을 제외하고 모는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야 했고, 공중 모임에서는 머리를 덮는 수건을 써야 했다.

이것은 여자들의 순결과 순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고린도 여성도들이 주어진 자유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교회가 은혜롭고 평화 가운데 서기 위해서는(15.33) 반드시 어떤 질서가 있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가 유지해야 할 하나님의 질서의 3대 원리들을 살펴보자.

  

[1] 복종의 원리(3-7)

이것은 머리됨’(Headship)의 영적 질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다. 바울은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7), 만약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4). 반대로 여자는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5).

당시 교회 여성들은 공동체의 모임과 사교적인 만찬(포도주 파티)을 혼돈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교회의 거룩성(공공성)이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이다. 때문에 가정교회 여성들이 머리에 결혼한 여성임을 표하는 베일을 씀으로서 지금 모임이 사적이 아닌 공적임을, 거룩한 종교적 시간임을 깨우치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성자와 성부는 동등하신 분이시다(2.6)는 원리에 주목한다. 그러나 구속사를 위해서 성자는 성부에게 복종하셨다. 동일한 원리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발견된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지만(3.28) 여자는 남자에게 복속되어 있다(5.21-33). 이것이 머리됨의 원리이다.

 

[2] 남여의 상호의존성의 원리(8-12)

먼저 창조되고 나중에 창조된 것이 남녀의 우열(愚劣)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평등하다. 이렇듯 존재론적으로 차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는 아름다운 구별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3] 일반적인 원리(13-16)

일반적으로 본성상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를 한다. 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그리스인)이나 로마 사람들 모두가 이 일반적인 원리를 따랐다. 바울은 여자가 가려야 하는 이유를 교회의 질서 안에서 영적 원리로 제시하면서 당시 로마의 일반적 관례와 풍습과 저촉되지 않는, 그러나 그것 역시 성경의 원리와 대립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나의 원리를 밝힌다.

  

교회는 영적 질서가 생명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 질서를 통해서다. 하나님은 교회의 영적 질서가 복종과 상호 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유지되기를 기대하신다. 그래서 남녀의 역할과 사명을 이렇게 밝혀 놓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질서는 세상이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지켜 나아가야 할 사명이다.

 

     

  • 댓글달기
    복종과 상호 의존성 원리에 의한 영적질서가 지켜져야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교회와 가정,직장등 그 어느 곳에서도 질서가 무너지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가 없을게다.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이다.
제목 날짜
369새벽 | 구원 그 이후, 이제는 거룩입니다(벧전1.13-21). (1) 2020.07.02
368수요 | 종의 심판(막11.12-26) 2020.07.01
367새벽 | 영원히 부를 찬송, 이유 있습니다(벧전 1.1-9) (2) 2020.07.01
366새벽 | 사랑은 교회의 미래다(고전16.13-24). (1) 2020.06.30
365새벽 | 이 공동체를 보라!(고전16.1-12) (1) 2020.06.29
364주일 | 삭개오입니까?(눅19.1-10) 2020.06.28
363새벽 | 부활 = 미래 + 현재(고전15.20-34) 2020.06.26
362새벽 | 부활, 성경대로 알라!(고전15.12-19) (1) 2020.06.25
361수요 | 종의 영광: 스가랴 9장 9절(막11.1-11) 2020.06.24
360새벽 | 부활, 성경대로 믿으라!(고전15.1-11) (1) 2020.06.24
359새벽 | 예배하기가 우선한다(고전14.26-40). (1) 2020.06.23
358새벽 | 예언하기를 원하라!(고전14.1-12) 2020.06.22
357주일 | 광야교회(행7.35-43) 2020.06.21
356새벽 | 은사 클리닉 서론(고전12.1-11) (1) 2020.06.19
355새벽 | 주의 성만찬에 대하여(고전11.17-34) 2020.06.18
354수요 | 바디매오 이야기(막10.46-52) 2020.06.18
353새벽 | 남자와 여자의 영적인 질서(고전11.2-16) (1) 2020.06.17
352새벽 |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고전10.23-11.1) 2020.06.16
351새벽 | 구원 그 이후, 중요하다(고전10.1-13) 2020.06.15
350주일 | 말씀에서 답을 찾다(룻3.1-9).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