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새벽 | 고전16.1-12
이 공동체를 보라!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1-4)
바울은 두 지평(이방과 유대)이 헌금(‘은혜’, 3/karis)이라는 실천적 삶을 통해 만나기를 무엇보다 원하고 있었다(롬15.26-27, 갈2.10). 헌금이란 내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2). 또 다른 지체를 세우기 위해 은혜(karis, 헌금, 3)를 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드림의 원리다.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교회)께 드리는 것, 이것은 성도의 특권이자 영광이다. 내가 너를 지체로서 세우는데 사용된다는 점, 이 헌금의 원리가 우리 교회에서도 강처럼 흐르게 되기를 기도한다.
전도여행 계획(5-9)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기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3-7, 4.19,21,11.34). 교회는 교회대로 상처난 몸이고(1.10-12, 3.3, 11.18-19), 바울은 바울대로 이런저런 오해(4,9장) 때문에 지쳤을 만도 하지만, 그래서 환영받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마음에는 변함없이 고린도교회가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세태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편단심으로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이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사역자의 마음이 또 있을까. 사랑은 상대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미 거래요 계산이다. 그 속에는 여전히 이기적인 주고받음의 득실을 따지는 세상의 논리를 버리지 못했다면 말이다.
디모데(10-11)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12)
종이에 쓴 편지는 물론 ‘주의 일을 힘쓰는 자’인 동역자 디모데를 함께 고린도교회에 보낸다. 누군가와 함께 동역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한편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의 사색당파(四色黨派, 1.12)의 한 파의 대표(?)가 될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12). 아볼로파(派)가 일정 부분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이기에, 어찌 보면 그가 다시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을 막았을 것 같은데 아니다. 이게 바울의 다른 점이다.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교회를 통한 선교비를 받는 일에 대한 권리포기를 선언했었다(9.11-15). 그런데 이번에는 헌금하기를 말한다(1-2). 언뜻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다. 하지만 그는 선교비를 받는 자신 때문에 복음이 값없이 된다면 당당하게 권리를 포기했다. 그런 그가 편지의 말미에 와서 다시 헌금하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권리마저도 포기할 수 있으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는 각자 형편이 닿는 대로 미리 준비한 헌금을 드릴 것을 명하는 바울, 자신에게는 철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바울, 그를 보면서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절제하고 있고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게 있는 것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늘도 주께서 “너 그럴 수 있겠느냐?”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