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새벽 | 벧전1.1-9
영원히 부를 찬송, 이유 있습니다.
베드로는 문안 인사에 이어 곧바로 ‘찬양받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흩어진 나그네’(1)가 무슨 찬양을 한다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절이 그것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자, 그럼 그가 찬송을 부를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다시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이다(3).
나는 거듭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안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있음을 볼 때 그렇다. 그런데 이같은 거듭남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시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곧바로 인간의 ‘공로 사상’이 활개를 친다. 만약 인간과 합작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하나님만이 찬양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은 거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듭났을 뿐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찬송 받으실 분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보존된 유산(遺産)을 주시기 때문이다(4).
하늘 기업은 첫째, 썩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더럽혀지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여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다 씻어 주시기 때문이다. 셋째, 퇴색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거듭남의 은혜와 하늘 기업의 영광은 변함이 없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5-6).
나는 믿음을 통해서 살고,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기뻐하라!(6,8).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고난이 오면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잠깐’ 근심이 아니라 ‘계속’ 근심의 경향이 많다. 그것만큼 5절의 보호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잠깐 근심을 낳지만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결국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버린다.
믿음이란 온실(溫室)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란다(7-9).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비바람 가운데에서는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야생화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끄덕하지 않고 피어난다.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떤 시련과 시험을 만나면 나도 미처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믿음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1절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이 땅(세상)을 무대 삼아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성도의 삶이다. 주님은 지금 이 척박한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찬송하리로다!’를 따라 살도록 나를 부르셨다. 우리는 이를 고난이라고 쓰고, 찬송이라 노래한다. 이것이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이다.
영원히 부를 노래가 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다. 결코 파괴되거나, 취소되거나, 무용한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이 신비한 비밀과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영원하다. 성도는 고난과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