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새벽 | 사35.1-10
시온의 영광: 영영한 희락을 띠고
하나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심판은 그분이 계획하신 섭리의 마침표가 아니다. 역사는 ‘거룩한 길’(8)을 따르는 ‘구속함을 받은 자’(속량함을 받은 자들, 8,9,10)와 함께 한다. 하나님은 광야와 메마른 사막이 기뻐하며, 또한 무성한 꽃이 피어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당신의 영광을 보도록 하신다(1-2). 전혀 새로운 삶의 희망을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3-4), 에덴의 회복은 물론(6-7),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구원의 세계를 멀리서 바라본다(5-6a, 61.1a):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 못 듣는 자가 들으며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그렇다면 이러한 영광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시온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엡2.1-3)는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8-10)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놓으신 ‘대로’(大路, 8a), 즉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10.20)을 통해 돌아오게 되었다.
물론 이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다. 오직 ‘구속’(속량)함을 얻은 자들만을 위하여 예비된 ‘거룩한 길’이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한 자들, 그러니까 에돔의 후예들(34장)과 같은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코 출입할 수 없다. 이제 슬픔과 탄식은 사라지고 즐거움과 기쁨이, 그것도 “영영한 희락”(10)이 함께 할 것이다. 이로써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34.10b)라는 에돔과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 영영한 희락을 띠고”라는 시온이 완벽하게 대조된다.
감사할 뿐이다. 대로(大路)를 다닐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위해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나 공로와 같은 것들을 요구하셨다면 아마도 우리는 아직도 그 문 밖에 서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뻔했다. 죄인인 나를, 마치 에돔 멜로디를 즐기며 살던 나를 구속(구원, 속량)하시기까지 해 주시고 은혜로 출입증을 주셨단 말이다. 그것도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10b) 얻게 하셨다. 이 영광을 취소되지 않도록 영원한 선물로 주셨으니 내 어찌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10a)지 않을 수 있으랴!
“에돔의 … 세세에 황무하여 … 영영히 … 아무도 없겠고”(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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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35장)
아무리 생각해도 에돔에서 시온으로의 이동(shift)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 사막과도 같은 메마른 심령의 땅에도 백합화가 무성하게 피는 그날이 예고되고 있음이 감사할 뿐이다(35.1). 이것이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 하신다(35.2). 이 일은 주님께서(35.5-7, 마11.2-6) 구속(救贖, 구원, 속량)하심으로 말미암는다(35.8-10).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약한 … 떨리는 … 겁내는 … 두려워”(3-4)서 불신앙에 휘청거리는 몰골로 살지 않아야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 굳게”(35.3-4) 부르셨고, 동시에 그러지 못하고서 불신앙에 떠는 자들을 격려하며 섬기면서 살도록 부르셨다. 이게 구원 받은 이후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미’(already) 시온의 영광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 여전히 에돔의 심판 아래 있는 자처럼 인간적인,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모습으로 시온의 대로 앞에 서 있다면 이것은 중증(重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