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새벽 | 창39.1-23
형 통 주 의 보
우리는 형통이라 쓰고 고난이라 읽으라고 하면, 고난으로 살라하면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그 안에 든 형통이라는 열매를 얻으려면 먼저 고난의 언덕을 지나야 한다고 말씀한다. 39장이 그러하다. 먼저 20, 22절이다. 요셉은 감옥 이후의 시간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옥살이를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서도 매우 건강한 삶을 산다. 그는 고난 앞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罪)를 지으리이까.”(9) 이상하리만큼 요셉은 당당하다. 환경은 변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또한 어디에 있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21,23) 요셉이 요셉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그러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요셉은 그런 사람이다. 그가 이처럼 영적 거인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함께하심 때문이다.
형통이 뭐길래: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3)
성경이 요셉이 총리가 된 이후를 설명할 때 ‘그가 형통했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형통하다. 감옥과 형통은 무슨 관계일까? 내가 지금 요셉과 같은 고통 속에 있는데 문제는 바로 그때 ‘너는 형통하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넘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감옥에서 형통하지 못할까? 요셉만이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 감옥까지는 요셉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이 오히려 그를 형통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감옥이 실패를 더 분명히 해 주는 것이 된다. 왜 그럴까요? 먼저, 이제 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감옥에 있는 것은 형통하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옥은 형통이 아니라고, 형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확신해 버린다.
그러나 실패 안에서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이 보인다. 때문에 그는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셉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감옥에 있는 요셉을 포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요셉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당신은 형통한가?
요셉이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은 형통을 만들기 위해서 수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견고함에 있다. 형통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덤으로 주어진 복이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위기의 때에 오히려 강하다. 그들은 모두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고난의 파도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파도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영광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나아가리!’ 이처럼 고난의 파도타기를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형통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형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어떤 행위를 동원하고 -예를 들자면, 금식하거나 헌금을 드리거나 하는 것들과 같은 그런 종교 행위들을 동원해서 결국은 내가 목적하고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오는 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원하는 식의 형통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시는 하나님 편에서의 형통과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