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수요 | 왕하6.14-19
아람 vs 사마리아
때는 오므리 왕조(왕상16.21-왕하10.36)의 후반부다. 잘 한 것이 없음에도 사마리아(북왕국 이스라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아람(Aram) : 왕
엘리사는 아람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면서 작전을 수행할 따마다 이스라엘 왕에게 피할 수 있는 병법을 정확하게 알림으로써 아람의 공격을 무력하게 만든다(8-12). 이를 알게 된 아람왕은 마침내 엘리사를 잡기 위해 그가 거주하고 있는 도단성을 포위한다(13-14).
이쯤 되면 지금 아람은 엘리사(이스라엘)와 싸우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람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이렇듯 영적으로, 그리고 마침내 육적으로도 눈이 멀어있다(18). 사실 아람은 나아만의 일을 치를 때 이미 사마리아에서 능력의 엘리사가 사역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5.4-5a), 나아만의 문둥병이 치료되어 돌아왔을 때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스라엘(사마리아)을 쳐들어온다. 이렇듯 세상은 하나님까지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오만(망상)에 빠져 있다.
사마리아(Samaria): 엘리사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다 보고 있는 중이다(10). 하지만 그는 악명 높은 오므리 왕조(왕상16.21-왕하10.36)의 한 왕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처럼 패역한 왕에게도 엘리사를 통해 승리를 맛보게 하신다. 그뿐 아니다. 눈먼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에 포위되었을 때 단지 전쟁의 시각에서만 지금 벌어지는 사건을 볼 능력이 없는 자였다(21).
아람은 이미 엘리사(하나님)에게 대항하고 있고, 사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반응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15b)에 나타나듯 역시 하나님을 보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하지만 엘리사처럼 보아야만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16)-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사 외에 그 누구도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엘리사의 기도가 압권이다(17). 지금 아람이든, 이스라엘이든 간에 저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리지 못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이 패역한 시대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주(主)되심과 전능하심을 드러내시는데 이를 알고, 보고, 느끼고, 깨닫고, 그래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당신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 처해 있으니... 그래서 엘리사는 이 혼탁한 시대를 적나라하게 밝히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것, 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 오므리 왕조(왕상16.21-왕하10.36)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알이 아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뜨는데 있다(17). 그래야만 멸망으로 가는 길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이를 사마리아(북왕국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엘리사(나)의 중보기도에 의해 사환(너)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임재(‘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는 것은 그 시대를 향한 복음이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7,000인이 해야 할 사명이 이것이다(왕상19.18). 이것이 사마리아가 다시 사는(부흥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