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수요 | 마16.16
마태복음 맥잡기
임마누엘
A ‘Immanuel’(1.23)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X 마태복음: 왕이신 그리스도_약속된 메시아
A' ‘Immanuel’(28.20) - “항상 함께 있으리라.”
구약과 신약이 서로 만난다(1.1). 구약은 예언(약속)하였고 신약은 이를 성취하는데, 이의 성취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마태는 이를 모형(Type, 구약-인물, 사건, 제도)과 실체(Antitype, 예수) 사이의 성취라는 관계로 열어감에 있어 이 구원사의 흐름을 끝없이 방해(중단)하는 세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해서 천국 복음을 따르는 자들의 숨 막히는 긴장을 연속적인 대화의 기법을 통해 전개해 간다.
이런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묵묵히 구약의 약속(예언)을 성취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이것의 위기(긴장)를 다섯 편의 설교를 통해서 정면으로 돌파해 가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언(言)과 행(行)이 구속사의 전 영역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래서 그 누구도, 즉 사람(종교지도자들, 백성들, 때로 제자들)이나 사탄(4.1-11)도 결국은 패배하게 되는 것과 놀라우리만큼 일치하면서 끝까지 일관되고 있다. 이로써 아브라함 → 다윗 → 예수 그리스도(이상 1.1) → 12제자(10.2-4) → 내 교회(16.18) → 세상 끝 날(28.20)까지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천국의 옴(이룸)을 거역할 수 없다. 마태는 이를 구약의 말씀(예언)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영원까지를 내다보도록 이끈다.
한편 마태복음의 독자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마태복음은 유대적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아람어가 번역되지 않고 쓰이고 있으며(5.22, 27.6), 유대적 습관들이 설명 없이 언급되고 있고(15.2, 23.5, 23.27), 곳곳에서 유대적인 표현들(천국 즉 하늘나라라는 표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도 그렇다)이 사용되고 있다. 더욱 복음을 전파해야 할 영역이 이스라엘로 제한되고 있다는 점에서(10.5-6, 15.24, 이 둘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에서 족보가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1.1-17). 또한 ‘다윗의 자손’(9회)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동시에 마태는 유대로부터 ‘모든 족속으로’(28.19)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내다봄으로써 유대주의를 극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反유대적이다(21.31,43, 22.8-9, 23.1-36,37-38)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대치되는 긴장이 고조된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배척의 결과로서 이방인이 은혜(어부지리, 漁父之利)를 입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주님의 초기 공생애 사역 중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주님의 평가에서 그렇다(8.11-12). 이제 초대교회(마태의 독자들)와 유대인과의 긴장 사이에서 親유대적이자 反유대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고 있는 마태의 신학 앞에 비로소 서게 된 셈이다. 이 긴장은 순전히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야와 다른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