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맛있는 말씀묵상, pp.29-30) - QT 마무리(31강)
4.4.1. 꾸준함: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4.4.2. 성실함: 일찍 일어난 새가 모이 하나 더 먹는다.
4.4.3. 건강함: 뽕잎을 잘 먹은 누애가 양질의 명주실을 만든다.
묵상은 하나의 방법론이 아니기 때문에 묵상하는 법을 배웠다고 곧바로 묵상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더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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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수요 | 요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예수님은 육신을 입기 이전에도 계셨다(1-3, 8.58). 그러니까 예수님은 피조물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의 부분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는 14절에서나 나타나는데,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a)로 말미암아 그분을 눈으로 직접 보기 이전, 바로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에서 요한의 복음은 시작된다.
태초에 계신 말씀(1-3)
창세기 1장 1-5절 말씀과 요한복음이 연결되는 것은 말씀(Logos)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1-2).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만물의 창조가 말씀이신 하나님 없이 지은 바 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3). 이것이 성자(聖子)이신 예수님의 선재(先在) 교리다. 예수님은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다. 또는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가 아니다. 한 인간이 어느 날 진리를 깨닫고, 터득하고, 득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자의식(自意識)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게 아니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생명의 빛(4-5)
‘말씀 = 그리스도 =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드러난다. 한 인격 속에 양성, 즉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거하신 분, 그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 그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태초부터,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창조 이후 세상은 곧바로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으나 어두움이 깨닫거나 이기지 못하였다(5). 세상이 어두움임에도 불구하고 빛으로 오셨다. 어두움을 피하시거나, 나무라시거나, 진노로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그러셨음에도 인간이 그것을 알거나 모르거나를 막론하고 오셨다.
1-4절의 진리이시며,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두움인 ‘나’에게까지 그 참 빛을 비추셨다. 나(인간, 죄인)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 영적 어두움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빛을 이길 수 없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죄인(罪人)의 어두움이었다. 이게 죄인인 나이자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먼저 알고, 믿고, 또 믿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구원을 발견하고, 영생의 세계를 알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뭐 이런 거룩한 일들을 스스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영원한 ‘어두움’ 가운데 빠진 죄인일 뿐이다.
요한은 이 진리를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었는가? 아니다. 그 역시 알게 되었을 뿐이며,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었을 뿐이다. 태초에, 창조의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지 못했던 한 피조물에 불과한 요한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진리를 깨닫고,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생명의 빛이신 말씀(Logos)이신 하나님 자신이 모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 자신에게도 빛이었기 때문이다(4b).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이, 계시 없이, 말씀 없이, 인간 스스로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을 아는 그런 일은 없다. 요한은 그것은 ‘어두움’이라는 한 단어로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