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수요 | 요7.53-8.11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3-9).
때는 아침인데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를 시험한다(6a).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5a)라고 말하는 고소자들의 말은 맞다(레20.10, 신21.24). 그러나 문제는 6절이다. 이들은 율법을 자기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도구)으로 사용한다. 의(義)와 옳음과 말씀으로 포장해서 말이다. 이들에게는 한 여인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죄책감과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 여인을 미끼로 또 다른 사람을 죄 아래로 몰아가려는 음모만이 있을 뿐이다.
이 간음죄(레20.10)를 따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가. 바리새인들의 진짜 의도는 이 여인을 미끼로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찾는데 있었다. 율법의 지식이 결국은 한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으로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형식과 제도와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b, 렘17.13 참조)
참으로 뜻 밖의 기적이 여기서 시작된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끌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끌고 온 자들은 다들 주님을 떠났다. 마침내 죄인이라고 한 여인, 죽어야 한다고 하던 여인, 돌무덤에 쌓여야 할 여인, 오직 그녀만이 주님 앞에 서 있다. 자기 발로 걸어온 게 아니다. 원해서 온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간음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 즉, 죄인이기에 만났다.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죄인을 잡아 끌고 온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 돌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가? 마침내 참 빛과 참 어두움이 만났다. 여인은 뜻 밖의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
여인은 문제를 낳았으나 주님은 해답을 주신다. 마침내 사죄(赦罪)의 선언이 선포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 주님은 여인이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 그녀는 분명 율법을 범한 죄인이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다. 죄 없다고 아우성 치던 자들은 이 선언의 무대에 없고, 죄 범한 인생만이 이와 같은 복된 선언을 주께로부터 받는다.
여인이 잘나서, 여인이 원해서, 여인이 알고서, 여인이 찾아서, 여인이 두드려서 만난 예수님이 아니다. 율법을 범한 죄인이기에 주님을 만났다. 바리새인들이 놓은 율법이라는 미끼에 걸려서가 아니다. 그것은 죽이기 위한 음모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 미끼로부터 여인을 해방하신다. 자유케 하신다. 죄를 진실로 깨닫게 하시고, 더 이상 죄 아래 살아가지 않도록 하신다. 죽이기에 살리기로 답하신다. 죽을 죄인도 주님께만 가면 이처럼 산다. 내가 그랬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럴 것이다. 결코 내가, 여인이 잘나서가 아니다.
은혜는 뜻 밖의 장소에서, 뜻 밖의 시간에, 뜻 밖의 형편과 상황에서 임한다. 돌무덤이 쌓일 줄 알았던 곳에 생명의 꽃이 피어난다. 이게 예수님이 하시는 목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