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수요 | 매일성경 – 요한복음01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옥외 빈 들에서 가버나움 회당으로(59, 마14.13), 표적을 보고 온 5천이나 되는 큰 무리에서 배들을 타고 일용할 양식을 찾아 온 소수와 핍박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2,10,16,22-24,26), 그러나 무엇보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찾아온 자들에게다(24). 하지만 이들은 아직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
마침내 주님은 회당이라는 공개된 자리에서 표적을 행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기 시작하신다(26- ). 제자들도 있지만(21),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찾아온 자들(22-24), 그리고 핍박과 죽음이라는 도전장을 공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16,18), 이들의 끈질긴 질문들이 네 번째 표적 이후의 요한복음 6장의 호흡을 숨가쁘게 만들고 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2-29).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빵의 문제, 그러니까 ‘썩은 양식’(27a)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주님은 아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그러니까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곤 한다.
하지만 이 열심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27). 이것을 위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29).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은 어떤 행동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30-35).
‘장차 … 보리라’(1.50-51)의 꿈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임하고 있다. 오직 주님께 ‘오는 자’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말이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6-40).
오병이어의 표적은 심각하게 오해되었다(15,26,34). 이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b)에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육신의 떡은 다시 배고프다. 오직 예수 그 분만이 나의 양식이다(35). 지금 회당에서 주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두 부류,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29) 자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36) 자들로 나누인다. 이들 가운데 한쪽은 잃어버릴 것이며, 다른 한쪽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이 생명의 떡을 보는 믿음을 표적(sign)으로 보이신다. 다시 한번 믿음을 깊이 생각한다. 믿음을 내가 만들거나, 자가발전(自家發電)하거나, 내 능력과 힘으로 충전시킬 수 있는,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1장 12-13절에서 다시금 새롭게 확인하는 은혜, 그러기에 다시 믿음의 기본기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씀을 붙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