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수요 | 눅8.4-15
마음이라는 네 가지 색깔의 밭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밭은 어디인가. 모든 씨는 밭에 뿌리지만 말씀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 뿌린다. 즉, 말씀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밭은 인간 심성이라는 마음의 밭이다. 주님의 해석에서도 이는 분명하다(11-15).
왜 똑같이 말씀을 듣는데 이러한 다른 결과가 발생할까. 매우 중요한 사실은 네 종류의 밭 모두가 다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다(12,13,14,15): “말씀을 들은 자니 … 말씀을 들 때에 … 말씀을 들은 자이나 … 말씀을 듣고 ….” 예수께서 똑같이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는데도 왜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가.
길가에(5,12)
마귀가 늘 마음에 뿌리운 말씀이라는 씨앗을 빼앗는다. 밭으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어 버렸기에 밭을 살리는 씨앗이 뿌려지고 있음에도, 말씀이 그 밭을 살리겠다고 찾아왔음에도 마귀(‘악한 자’)에게 그만 이 씨앗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바위 위에(6,13)
씨앗을 품을 만한 밭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흙이 얇고 깊지 않다(5). 때문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꿈을 펼칠 수가 없다(6). 이 밭의 특징은 “기쁨으로 받으나 … 잠깐 믿다가”로 요약된다. 시작은 되는 것 같은데 언제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가 없다. 왜냐하면 “뿌리가 없어”(13) 그렇다. 말씀이라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할 정도로 문제는 늘 밭에 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것은 좋다. 하지만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까지 그것을 붙들고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13)고 만다. 말씀은 뿌려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하는 밭에게도 환난과 핍박은 있다. 이렇듯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모든 어려움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는 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로부터 넘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가시떨기 속에(7,14)
말씀이 자라는 것은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라는 가시가 함께 자라는 곳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이것들이 호시탐탐 말씀의 기운을 가로막는다. 돌밭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13)라면 가시떨기밭은 세상이라는 “기운에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14) 경우다.
세상은 언제나 말씀을 들은 자의 마음의 뜰에 말씀이 뿌리내려 자라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잠시 있다 없어질 가시덤불과 같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좇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느 때나 세상이 복음을 환영한 적이 있는가. 말씀이 자라듯 그것을 방해하는 가시도 함께 자란다(7).
좋은 땅에(8,15)
모든 밭이 ‘말씀을 들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런데 좋은 땅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깨닫는” 것으로 나아갔다. 좋은 땅은 깨달은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지켰다. 그 과정에서 마귀가 빼앗아 가는 것이나(12), 시련이나(13),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14)이라는 갖은 방해로부터 인내라는 수고가 있었다.
결실이란 그저 심었다고 해서 때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시작하신 아버지께서 끝까지 이루실 줄을 들은 바 말씀을 통해서 믿고, 그래서 그것만큼 인내로 주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결실하는 기쁨에의 꿈은 현실이 된다.
마침내 천국의 비밀은 ‘너희’와 ‘다른 사람’(그들)으로 양분된다(10). 세상은 이처럼 크게는 두 종류의 ‘인생밭’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 씨가 결실치 못한 것은 씨앗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은 밭의 문제였다(9-15). 천국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악한 자, 환난이나 핍박,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결국 문제는 이것들이었다. 천국은 이것들과 매우 깊은 긴장 관계에 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다. 미물에 불과한 이름 없는 둘국화도 가을에 피려면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한다. 그리고 여름이라는 태풍과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하물며 사람이랴! 아픈 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 되려면 가위질을 아껴서는 안 된다. 사랑하고 축복하기에 가위질을 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