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수요 | 수11.21-23
종전(終戰)의 그늘: 약간주의보
[민수기 33장의 담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50-51)?
a.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52)
b.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52)
c. “산당을 ‘다’ 헐고”(52)
d.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3).
그러나 이어지는 또 하나의 명령이 있다: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55a)?
“너희가 남겨둔 자가”(55b)?
a. “너희의 눈에 가시와”(55c)
b.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55c)
c.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55c)
d.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56c)
‘약간’이 골리앗일 줄이야!
가나안이라는 것만으로 안전지대가 아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 이하에 보면, 그 ‘약간’이 골리앗으로 자랐다는 사실이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뺌이요.”(삼상17.4) 이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집요하게도 가나안을 완전히 진멸할 것을 말씀하셨다(민33.50-56, 신7.16-21, 수23.12-13):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내 안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잠복해 있던 죄가 어느 날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이 곧바로 왕노릇 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약간’은 이렇듯 치명적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6-7)
주님 없이 만들어 놓은 [‘약간’ 남았더라의 ‘더하기’]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주님 없이 만들어 놓은 [‘가드’ 덧셈 = 골리앗]이라는 불신앙으로는 곤란하다. 계속해서 애굽과 광야라는 옛 것의 잔머리를 가지고 가나안에서마저 재주 부리려는 광대 짓으로는 안 된다. 세상과 애굽에서는 통했을지 모르나 가나안(그리스도, 구원, 교회) 안에서는 안 된다. 서로 망하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죄악의 꽃은 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생활 가운데도 범죄는 계속되고 있음이 시리고 아플 뿐이다. 때문에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기에는 너무 연약한 존재임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을 수밖에 없다.
마침내 찾아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평화와 축복이 인생의 성공을 끝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왜 그런가? ‘약간’ 안에 들어있는 불순종 덧셈 때문이다. 보이는 전쟁은 멈추었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그치고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었던 그때로부터, 바로 그곳 안에서 ‘가사’(약간)의 독초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