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382주일 | 에베소: 성령의 임하심, 그 이후(행19.1-10[2])

1382주일 | 19.1-10(2)

에베소: 성령의 임하심, 그 이후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3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20.31; 쉬운성경)

 

마침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사도행전이 증언하는 성령이 임하셨다(6).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8절이다. 성령이 오셨는데 왜 바울은 3개월이나(8), 다시 2년 동안이나(10), 이어지는 눈물로, 쉬지 않고(20.31),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강론하고 설득하는 기나긴 목회 시간을 가졌을까.

사도행전 18절의 약속이 성취되었으니까, 그렇다면 에베소 역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바울은 이처럼 수고하는 것일까? 이것이 다시 8절 이하를 주목하는 이유다.

 

 

성령의 임하심, 그 이후

 

그렇다면 앞서 사도행전에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이후는 어떠했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약속하신 성령이 마침내 사도행전에 임하신 때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이다.

[2] 사도행전 10장에서 마침내 성령이 이방인(헬라인)에게 임하신, 그러니까 이번에는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10.23b-33 34-43)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44)셨고, 이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 전부다(47-49).

[3]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며 전도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신다(6). 그런데 성령이 임하였는데 그 이후가 앞서 사도행전 2장과 10장과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셨는데 이어지는 것이 8-10절이다. 8절 이하일까? 그것도 이어서 3개월 동안이나 8절이다. 이것도 모자라서였을까. 무려 2년 동안이다(10a). 나중에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에 초대해 놓고서 그들에게 전한 마지막 고별설교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20.31)

 

 

처방과 비전(8-10):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라!

 

바울은 2장과 10장과는 다르게 성령님의 임하심 이후를 이어가고 있을까? 바울은 이 여세를 몰아 3개월이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랬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9a)처럼 냉담한 반응을 보인 곳이 에베소다. 12명의 성도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분명한 증거가 에베소 앞에 펼쳐 보여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만만치 않은 영적 분위기다. 바울이 전도해도 이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보다는 대단히 긴 3개월이나 헌신한 것 아닌가(8).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의 초대 앞에 서는 은혜라는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까지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물론 기존의 제자(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한 것은 있었으나(1-7), 하지만 새로운 성도들이 복음 앞에 결신하게 되는 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보고가 없다(8-9a).

이것이 바울의 새로운 선교 전략이다(9b-10). 그는 3개월의 수고가 헛되게 되지 않도록 한다. 또한 무턱대고 비방하는 무리들과 기약 없는 토론과 변론에 시간을 쓰지도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9b-10a) 전력을 다 해 제자훈련에 전념한다.

사과 열매 하나를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3년을 하루같이 제자삼기(목회)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20.31). 참으로 길고 긴 장기 사역이었다. 18장에서 바울은 1년여 전에 지나가는 길에 자신이(18.18-21),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리고 아볼로가 각각 뿌려 놓았던 복음의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 알곡으로 열매맺을 것을 믿었다. 그래서 날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20.31)면서 3년을 하루같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것이 성령이 임하신 이후의 몫이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에베소교회다(20.17-38): 나는 예수를 믿어 증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다시 기초적인 것을 생각해 본다.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고는 사도행전적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무릇 사도행전을 무대로 삼아, 그리고 그 후예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이 복음서에서 이미 약속하신 내용이기도 하다(14.16-21,25-26, 15.26-27, 16.7-15).

사도행전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분모는 성령님이 임하신 것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지 않은 자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임하지 않는 자들은 오히려 복음을 거부하고, 전도자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신 이후의 나는 어떤가?’

주님을 믿고 살아가던 어느 날 성령님은 에베소교회에 임하셨다. 오늘 본문의 12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7). 잘 보면, 사도행전의 사람들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성령님에 대해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여 무지할 때에, 그런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경우는 없다. 복음을 듣고,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또한 들음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촉과 감각이 생겨서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심판하실 악하고 추한 죄악을 회개하는 자들에게 성령님은 오셨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하지만 이처럼 성령님이 임하셨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전부 다 완성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임하심 그 이후의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8-10절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이제는 구원 받은 자로서 성령님 안에 살아가는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누구도 자동적으로 신앙이 성장하거나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에베소교회가 3년이나 바울의 목회를 통해서 제자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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