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새벽 | 시42.1-11
‘어찌하여’에도 하나님입니다!(1)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다(1-5).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을 향해 갈급한 영혼은 어떤 것일까. 목이 갈한 사슴이 신기루가 물인줄 알고 비틀거리며 찾아 나서지만 결국 가도가도 물을 만나지 못해 쓰러지고야 마는 모습에 자신의 영적 목마름과 갈급함을 담아낸다(1).
하지만 이런 모습은 본 ‘사람들’(3) 곧 ‘대적’(10)은 다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 고라 자손의 영적 고독과 처절함은 극에 달한다. 하나님은 응답이 없고, 원수들은 조롱하고, 그 사이에서 자신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중이다. 이에 ‘낙심 … 불안’(5a)이 찾아와 무너지게 만든다.
사실 대부분은 이 한계상황에서 무너지고야 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4)며 살았었다. 그래서 지금의 바닥이 더 시리고 아픈 것이다. 그러니 어제와 너무나 다른 오늘의 모습을 보며 원수 대적들이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차고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막장에서 그는 하나님을 붙든다. 긍휼과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 예전처럼 주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서기를 갈망하면서 다시금 희망의 노래를 토해낸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11)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다(6-11).
고라 자손이 참 대단한 것은 자신의 문제도 알고, 그것의 해답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런 형편 때문에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6a)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는 이 문제를 어찌보면 참 가볍게 해결한다.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여러 변방을 전전할 때에 그때 주께 부르짖었을 때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간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의 언덕길을 통과할 때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인도하셨다면, 그렇다면 삶의 파도가 시인을 휩쓸어갈 만큼 강렬하다하더라도(7), 그럼에도 주야로 날마다 주를 찬송하며 이기고 싶다는 소망을 기도로 올려드린다(8).
그러나 이 고백이 쉽게 나온 게 아니다. 그의 간증이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9) 안팎으로부터 밀고 들어오는 대적의 비방이 여전히 후렴구처럼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고 있어서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또 다시 흔들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의 ‘낙심 … 불안’(11a)에 찬 신음소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기도의 향이 되어 올라간다: ‘하나님,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겠나이다. 하나님,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따라가는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나이다.’ 이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이처럼 기도로 토해진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b) 이 신음소리와도 같고, 절규와도 같은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삶의 처절한 막장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무릎을 꿇는 시인의 모습이 오늘 하나님이 전해 주시는 메시지요 선물이다.
하나님 안에 있어도 영혼의 목마름에는 끝이 없다. 아니 더 처절하고, 아프고, 시리고, 눈물 난다. 이게 신앙의 길이고, 제자의 길이고, 구도자의 길이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길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심과 불안이 한 모퉁이를 점령해 들어와서다. 물론 다른 한 쪽은 소망과 도우심에 따른 찬송이 있기에 이 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이처럼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고난으로 가득 찬 십자가의 길이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