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새벽 | 눅9.18-27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18)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다. 세상의 답변은 언제나 주님의 기대와 요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진리, 교회, 생명)의 편이 아니다. 노아 시대를 보라.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를 보라!(마24.37-39) 거듭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요3.3). 그에게는 오직 자기의 생각(지식, 경험, 고집, 판단)만이 옳을 뿐이다. 세상의 진단은 언제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위증이다. 언제 세상이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칭송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종종 내부적으로 우리의 정체에 대해서 진단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한편으로 정말 입을 조심해야 한다. ‘말’(言)은 다리가 없고,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 말에는 냄새도 있고, 색깔도 있고, 분위기도 있고, 강하기도 하고, 혹은 부드럽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변화무쌍한 실체이다. 살아있는 카멜레온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베드로처럼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한다(벧후3.18). 선지자 호세야는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4.1,6; 6.2)라고 말씀한다.
첫 번째 수난예고(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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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23): 제자도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사명이자, 명령이다. 여기 23-24절 말씀은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후에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신다.
주님은 드디어 제자들에게 자신이 무엇 때문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가를 밝힐 때가 -그것도 9장에 이르러서!- 되었음을 아셨다. 당신의 사역이 갈보리 십자가로 집중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금 사역의 초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신다.
한편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선포되는 시점(22)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수난예고는 이 단락의 중심이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다음 3가지를 말씀하신다. [1] “자기를 부인하라!”(23) 쉽게 말하면 “나는 없어져야 한다.” 그런 말이다. 어떻게 없어질 수 있는가? 지구를 떠나야 하는가. 그런 말이 나이다. 말씀 앞에 설 때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내가(엡2.1-3)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나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2]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23).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훨씬 어려운 방법으로 살겠다는 실존적인 결단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철저하게 거꾸로 사셨던 우리 주님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는 길(선택, 가치관, 방식)과 성경이 말하는 삶의 정황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3]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라!(24) 나를 위해 살면, 주님은 없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살면 내가 비로소 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paradox)이다. 주님께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