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5수요 | 요2.13-22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소개된다(14-16). 하지만 ‘성전된 자기 육체’(21)와 비교된 예루살렘 성전의 몰골은 한마디로 참담하다. 성전과 관련하여 요한은 앞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라고 전한다. 여기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성막을 치시매’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성육신이 곧 보이는 성전으로 임하신 것이다.
14절 - “성전 안에서 … 보시고.”
성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나고, 죄사함을 받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로서 주어진 하늘의 문이다. 그런데 단지 장사하는 사람들로 득실거리고, 사람과 제물(짐승)의 냄새만 풍기고 있으니 주께서 이처럼 언행하시는 것 아닌가.
16절 -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당시의 종교적, 영적(靈的) 형편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얼마나 긴 영적 혼돈이요, 방황인가.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제사가 있고, 제물이 있고, 제사를 드리는 자가 있어도 어느 것 하나 자기 기능(역할,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없다. 타락은 이처럼 성전(교회)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남기는 장사꾼들만 남게 되어 버렸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19-22절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예수님의 성전청결 언행은 곧바로 유대인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8, 4.48 참조) 진리의 주인을 모르면 그 진리 앞에서도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한다.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참 성전(성막, 1.14a)이신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고, 비추어야 한다. 그런데 기막힌 역설은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친히 장막으로 이 땅에 펼치신 그리스도를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참 빛이신 성전이 오셔서 어두운 예루살렘 성전을 비추고 계시기 때문에 이제 타락한 성전의 어두움(14-16)은 물러갈 때가 되었다. 바로 그때가 임박했다. 이 역시 ‘장차 … 보리라’는 주님의 영광에 대한 비전 속에서 성취될 것이다(21-22). 이걸 모르니까 20절처럼 대답할 수 밖에 없다.
46년이 어떻게 3일로 이해될 수 있으랴. 성전이 어떻게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킨다는 이 진리를 알 수 있으랴.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 본문의 제자들도 ‘장차 … 보리라’를 통해서 해결되고 있다(22).
헐어야 할 것은 좀 헐어 버리고 살아야 한다. 진짜 세워야 할 것이 그것들 때문에 방해받거나, 늦어지지 않아야 해서다. 주님의 은총의 빛이 아니면 이 영적 어두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감사한 것은 22절이 내 안에 진리로 임하였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b)- 교회의 몸되신 주심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이다. 우리에게도 3일만에 일으켜진 성전이 있다. ‘장차 … 보리라’가 내 안에도 이루어져 가고 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15.37-38)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새 예루살렘)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그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