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수요 | 막10.17-31[1]
구원받은 자는 다르게 산다.
(맛있는 마가복음, pp.111-112)
청년은 율법 준수라는 자기의(自己義)를 공로 삼아 천국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세의 재물을 붙들고 있다. 부자 청년은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 현세가 내세를 가로막고 있는데 그것은 재물이다. 역시 현세와 내세를 하나로 통합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재물이다. 한편 부자가 재물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결과적으로 천국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부자 청년의 딜레마(17-22)
‘무엇을 하여야’와 ‘영생을 얻으리’를 연결하고 있는 청년의 생각은 구원의 은총 앞에 서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敵)이다. 그는 “말라 … 하라.”(19)는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는 목적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말에 실망스럽다.
[천국표 영생보험]을 내가 불입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영생의 유무가 결정된다는 생각은 인간이 구원의 주도권과 결정권을 만들 수 있고, 스스로 소유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린다. 인간은 천국마저도 자신의 능력과 힘과 공로와 선행이라는 어떤 조건을 충족시킴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부자 청년은 그것을 위해 뭔가를 했기 때문에 당당하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쌓은 공로가 없기 때문에 절망한다.
그래서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로 이어지는 주님의 지적은 매우 절묘하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위해서 아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주님은 ‘하나’가 부족하다고 말씀한다. ‘다 지키었’(20)다는 것에 비하면 부족한 것 ‘한 가지’(21)는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청년이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 하나가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다 지킨 것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것을 다 했으니까 천국도 가야하고, 그랬으니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재물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는, 그러니까 내세도 현세도 모두가 다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거야말로 현대인의 우상이 아닌가.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그에게는 재물이 곧 하나님이다. 천국보다도 재물을 택했고, 그래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주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님을 만났고, 복음을 들었으나 그는 이것보다 자기 물질 편을 택했다. 물질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우상인 셈이다.
부의 소유가 축복인가? 주님의 말씀처럼 부라는 것이 오히려 천국을 위해 거치는 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진정으로 영생의 복음을 듣고, 영원한 나라를 소유할 사람으로 사는 자는 이 땅의 것에 목숨을 걸거나, 재물을 붙든 손 때문에 영생을 받을 손이 없는 자로 살지 않는다.
영원을 보며 사는 자는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하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은 영생과 멀어지게 만든 재물을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그에게 준 것이란 결국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b)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율법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있다하니(19-20) 참으로 구제 불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