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새벽 | 사37.1-20
승(承) - 히스기야 이야기(2a): 기도
“히스기아왕 14년에”(36.1) 찾아온 위기, 그 출구는 어디인가.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앗수르 산헤립의 신복인 랍사게는 거짓되고 요망한 입으로 ‘하나님을 훼방’(36.6,7,14,15,18 → 37.4)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다를 치려 온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일이라며 가증스럽게 허풍을 떨고 있다(36장). 하지만 34-35장의 멜로디 가운데 랍사게는 [에돔의 노래](34장)를 열창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을 노래한 것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7,34,38).
이어 두 번째 주자인 히스기야 차례다. 그는 과연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히스기야는 먼저 사절단으로부터 랍사게의 언행을 전해 듣는다(1a). 전하는 자나 그것을 듣는 자 모두 중요하다. 정확히 전해도 잘 듣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쪽으로 이야기가 흐를 수도 있다. 전하고 듣는 일이 잘 되었다 싶은 것은 듣고 난 이후에 보인 히스기야의 언행(言行)을 볼 때 그렇다: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b)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시온의 노래](35장)를 기도(祈禱)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로 더불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기를 소망한다(2-4). 그는 지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데(3), 그것은 먼저 랍사게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4a)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이 망언을 들으셨으니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b)는 메시지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앗수르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 내가 그를 … 죽게 하리라!”(6-7)는 언약을 즉각적으로 성취하시기 시작하신다(8-13).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 하나님은 “말씀하시”(6)고, 앗수르는 “그 때에”(9) 예루살렘 정복 계획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멜로디다. 그럼에도 시온의 노래를 훼방하려는 사탄의 모리배들의 악한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10-13). 이게 다 영적 전쟁의 흐름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앞서 “듣고 …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처럼 이번에도 “보고 …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14-15)로 불어오는 앗수르 역풍을 되받는다. 14년을 하루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신앙을 엿보게 되는 부분이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피할 바위시요 도와주실 분이심을(16), 그래서 “들으시옵소서 … 보시옵소서 … 들으시옵소서!”(17)라며 앗수르라는 거짓 인조신(人造神, 18-19)의 멸망을 기도한다. 그것만큼 하나님의 구원이 만방에 선포됨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이사야는 [에돔의 노래](34장)와 [시온의 노래](35장) 가운데 어떤 노래가 하나님의 멜로디이며,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원한 노래인가를 히스기야와 그의 기도를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거품처럼 사라지는 앗수르의 교만을 보면서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임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시면 말이다.
기도는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가, 끈질긴가, 확신에 찼는가, 많이 하는가, 의심하지 않는가라는 말하자면 기도자(祈禱者)의 어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이 땅의 소산이 아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이런 류의 변수들에 따라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도는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그 주도권이 있다. 기도를 요청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기도를 응답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자리가 히스기야처럼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가 된다면 그만큼 [시온의 노래](35장)는 가까이에 있다. 지금은 히스기야처럼 살 때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오직 하나님께, 오직 기도로,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응답과 섭리하심의 증거가 되고 싶다. 히스기야가 그린 그림이 조금씩 우리와 교회의 영적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아 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