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4수요 | 신32.19-33
그러므로 공의를 노래한다.
모세의 노래(설교)
서론(1-4)
이스라엘의 배도(5-18)
하나님의 공의(19-33)
하나님의 사랑(34-43)
‘그러므로’ 공의를 노래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불협화음이 예측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는 거역이 원인이다(1-4,6b,8-14 → 5-6a,15-18). 또한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19-33)과 그에 따른 처방(34-43)은 계속해서 긴장의 연속을 낳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대하신 자리로 다시 회복되기 위해 ‘이 노래’(31.19-22, 32장)를 통해 “기억하라 … 생각하라 … 물으라”(7a) 하시는 명령 앞에 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19-33)와 사랑(34-43)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자, 이 노래의 주제다.
하나님의 공의
이스라엘의 배은망덕(背恩忘德, 5-6a,15-18)을 하나님은 놓치지 않고 보셨다(19a).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결과를 가져온다(20a).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19)가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자, 하나님은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21b) 하는 것으로 당신의 분노를 재앙과 함께 폭발시키신다(22-23).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남녀노소(男女老少, 25b)를 불문하고 각양각색의 재앙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24-25a), 급기야 다 흩어 버려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신다(26).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들이 마치 자기들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패배시킨 것처럼 자랑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저들을 전멸시키지는 않았다(27).
문제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없어서 -다 죄(罪) 때문이다.- 왜 이처럼 패배라는 종말이 왔는가를 깨닫지 못한다(28-29).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집행하신다는 것을 정작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대적’(마귀, 17,31)들은 다 알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심었기 때문이다(32-33).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가나안의 미래는 이처럼 신명기 애가(哀歌)를 불러야 할 상황이라 하신다. 참으로 슬픈 노래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라면 인생은 뽑힌 뿌리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의(義)로움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사는 자다. 이걸 믿음으로 아멘하지 않으면 ‘자기 의’가 기준이 되어 절망과 교만을 자기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며 자가발전(自家發電)하다가 끝날 수 있다. 이처럼 미래는 결코 희망과 축복만으로 가득차 있지 않다. 확실히 가나안은 불확실성의 시대다.
죄는 하나님을 향하는 시선마저도 빼앗아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하나님의 능력은 더 크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백성을 죄가 잠시 흔들지라도, 그래서 곧바로 사망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는 그것을 결코 그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렇듯 죄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섭리의 법칙을 무력하게 만들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신가를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