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9수요 | 신7.1-15
가나안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한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이 하신다(1). 이때 이스라엘에 해야 할 일은 가나안 일곱 족속들을 ‘진멸’하는 것이다(2). 이것은 성민(聖民, ‘거룩한 백성’, 6)으로서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전(聖戰, 거룩한 전쟁)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민(1-6a)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창15.12-21)에 대한 성취다: “여호와께서 …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1) 이렇듯 가나안 정복전쟁은 하나님이 그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 이때 성민으로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천 대까지 복을 받게 될 것이다(6-7 → 1-5,8-11 → 12-15).
하나님의 성민으로서의 신분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것을 언행(言行)으로 성취하느냐에 있다(6a → 1-5). 그래서 죄악이 관영하게 된 가나안(창15.16)을 진멸해야 한다. 성민은 세상과 다르게 사는 거룩한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과 언약을 맺고 불쌍히 여기는 것도(2), 혼인도(3), 우상을 섬기는 일도(5) 금지된다. 이것들은 다 성민(聖民)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4a)써 가나안처럼 멸망되게 하는 지름길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은혜의 선물이지만(1) 이 거룩한 신분에 걸맞게 사는 것은 이스라엘의 책임이자 소명이다(2-6a). 이것은 가나안 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에서 성취된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죄악을 심판하는 일을 시작하시고, 이 일을 이스라엘에게 맡기심으로써 심판을 집행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에로의 부르심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선택(6b-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민(聖民)의 신분에 있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어떤 자격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다(1-6a → 6b-7). 이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신앙고백을 잃어버리지 않거나 잊어버리지 않게 되면 형통이 교만을 낳게 되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모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선민과 선택의 은총은 이스라엘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기초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한다(7b-8).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7). 선택뿐만 아니라 택하심 그 이후까지 모두를 다 하나님 편에서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가시기 때문이다(8). 하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형통이라는 장밋빛에 취해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시계(視界)에서 하나님을 놓칠 수 있다. 잘 될 때도 그렇지만(9), 그렇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10). 이스라엘은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고, 특별히 택하심 안에서 누리는 삶의 질(質)이 빛날수록 말씀을 준행하며 살아야 한다(11). 이것이 선민(選民)의 도리다.
하나님의 축복(12-15)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선택의 은총 앞에 우쭐거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은 하나님의 성민으로 선택된 은혜에 기초한다(12-15 → 1-11). 따라서 축복이라는 옷이 내 인생이라는 그림에 입혀질 때마다 그것이 나 때문에, 내가 선하고, 내가 바르게 살고, 내가 그것을 받을 만 한 어떤 자격과 조건이 되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자손과 땅의 소산이 번성하고(13-14), 또한 건강한 몸으로 살게 하실 때가 중요하다(15). 때때로 축복이라고 받은 이것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도구가 될 수 있기에 더 그렇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복의 자리에 있게 될 때 12절처럼 생각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12a) 언약과 사랑이 성취된 복을 맛보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13-15).
성민과 선택 안에 들어 있는 복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책임의 몫이다. 일단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지만 받은 이상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기 나름이다. 가나안이 그렇다. 죄와 어둠의 애굽으로부터 出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것은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들어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특권에는 언제나 거기에 걸맞은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나에게 분배해 주신 가나안은 건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