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9수요 | 시142.1-7
피난처를 기도처로 만드십시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라는 표제어가 눈에 띈다.
그는 왕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혹여 더운 여름을 피서하기 위해 시원한 동굴에 온 것일까. 시어(詩語)들을 읽어보면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시편 142편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는 지금 사냥꾼의 울무에 걸려든 새처럼 누군가의 포위망에 걸려있는 것 같은 위기의 상황에 빠져있다. 어떤 사건인지, 누구로부터의 고통인지, 그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의 통치 후반, 그러니까 밧세바 사건 이후에 찾아온 인생 하강곡선의 어느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일단 다 죄의 값을 치르는 과정에서 만난 환난이고 시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때에 다윗이 한 일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다. 놀랍다. 그는 어김없이 고난과 시련이 엄습해 오면 곧바로 하나님께 납작 무릎을 꿇는다. 그는 소년이었을 때 이미 사자와 곰의 수염을 잡고 레슬링을 했고, 골리앗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의 나이 30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통해 왕이 되기까지 야전을 떠돌며 광야에서 불굴의 전사로 준비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포위망에 걸려든 토끼같은 처지에 몰려있다. 앞서 젊었을 때처럼 싸우면 되지 않은가. 그런데 이처럼 상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그가 환난과 시련의 때에 꺼내든 카드다. 그게 다름 아닌 ‘기도’다.
기도: 굴에 있을 때에 한 일(1-2,6-7)
그는 자신의 원통함과 우환을 하나님 앞에 토해낸다(2). 그는 지금 심령이 상한 자로 흔들리는 중이다(3a). 왜냐하면 원통함과 우환으로 다윗을 포위해 들어오는 자들의 ‘올무’가 점차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다(3b). 그는 알고 있다. 이 싸움은 무엇으로 이길 수 있는가를!
그는 이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6a) ‘핍박하는 자들’(6b)에게서 건저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께 감사하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7). 하나님이 시작하신 인생의 씨름이라면 이것은 다윗의 능력이나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전쟁이 아님을 안 것이다.
피난처: 하나님만이 소망이다(4-5).
그러니까 하나님이다. 하나님만이 소망이다. 하나님만이 피난처이시다(5). 이것은 단지 지금 불어온 고난과 시련을 일단 피해 놓고 보자는 임기응변이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알고서 이를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누가 해결하느냐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게 다윗이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고통과 시련이 없는 인생은 없다. 원하는 평안이나 성공은 자꾸 나를 피해가는 것 같지만 시련과 환난은 원하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았음에도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 인생이 지나가는 길목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이때 이것을 대면하는 방식이다. 다윗이 위대하고 대단한 것은 고통과 시련 그 이후다. 다윗은 지금 우리가 중심에 놓고 읽어내고 있듯이 이 돌풍처럼 불어온 시련과 고통을 자신의 힘이나 경험에 의지해 풀어보겠다고 아우성치지 않는다. 다름 아닌 자신의 죄와 죄악에 따른 시련과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직 하나님께로, 기도자로 무릎 꿇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이 싸움은 자신의 전략이나 노림수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싸움이다. 그러면 이 싸움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기에 다윗은 피난처가 기도실이 된 것이다. 이 싸움의 피난처가 전략과 전술과 작전의 상황실이 아닌 이유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알고 있고, 그 죄에 대해 싸움을 걸어오신 하나님을 역시 알고 있다.
그 옛날 얍복 나룻터에서 천사, 곧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이스라엘)처럼 다윗은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고, 대응하며 싸울 때가 아님을 안 것이다. 우리의 심령과 영혼 역시,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영적 지각(통찰력)이 필요하다. 고통과 고난과 시련의 때에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