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6수요 | 시107.1-9
근심 중에 있는 자, 어찌할까?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2a)로서의 오늘이 있기까지(1-3), 그리하여 축복송으로 화답하기까지(8-9), 그의 지난 날들은 눈물겨운 한편의 간증이다(4-7). 그 가운데 “그 근심 중에”(6a), 동시에 그 형편에서도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는 그가 붙들었던 처절한 삶의 멜로디다.
고난송(4-7): 과거
‘그들’(2,4,6)은 누구인가?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2a) 곧 이스라엘 백성이자 이 시편을 기록한 시인이다. 자연인도 아니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도 아니며,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건강한 성도다. 그런데 바로 그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 그러니까 그런 ‘그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 그게 4절 이하다.
지금 저희의 형편은 처참한 ‘고난일기’다(4-5). 그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여호와께 부르짖는다(6b). 말이 쉽지, 이런 형편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린다는 것이 정답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고난 너머에 다시 영광을 주시면 그 영광 이후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겠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인생 전반전이 이처럼 엉망이 되어 있어도, 동시에 인생 후반전이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닌 때에, 바로 절망과 실패의 낭떠러지 바로 앞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어떤 자로 서 있는가. 예,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로 서 있다.
이것이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6a)라는 말씀이 품고 있는 절묘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려울 때, 무너져 있을 때, 그럴 때에 그만 더 참담하고 추한 몰골로 더 깊은 영적인 방황과 좌절을 배가시키는가. 대체로 사람들은 이러할 때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복음의 영광을 저버리거나 교회를 자퇴하거나 믿음생활의 방학을 선언해 버린다.
시인의 육체의 한계를 보라. 설상가상으로 영혼까지 부도 직전에 몰린 극한 목마름의 탄식을 보라. 그럼에도 그는 이것들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그 때에 무엇을 했느냐?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6)으면 그 이후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고난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6절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축복송(8-9): 오늘
그런 어제를 넘어, 오늘 부를 노래가 있다. 이처럼 찬송은 고난이라는 모판에서 자란다. 영광은 고통을 통해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열매 맺기 위해서는 기도를 먹고 자란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9)은 영혼의 부요가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병기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실 때 뺄셈으로 일하신다. 이처럼 고난이라는 하나님의 뺄셈에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무너지고 자빠진 게 아니라 “그 근심 중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광야학교에 우리를 입학시키셔서 호된 훈련 과정을 지나게 하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럴까. 아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게 인생이 아님을, 내 능력과 이 땅에 쌓아놓은 것들이 나의 안식이거나 생명일 수 없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